나는 지금 기내에서 제공되는 땅콩을 먹고 있다. 생각보다 맛있다. 아니 너무 맛있다고 많이 먹은 탓에 아까는 정말 심하게 토했다. 자고로 욕심이 많으면 다치는 법.
TV에서만 보았던 기내식을 미친 듯이 먹은 탓, 아니 그보다는 그전에 그 이름도 찬란한 화이트 와인을 아주 맛있게 들이킨 것이 화근이다. 기압때문에 술에 쉽게 취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시원하게 원샷, 기분은 참 좋았는데, 채 10분이 못되어 온몸이 나른하고 메스꺼워진 것이다.
심상치 않은 촌뜨기 기질, 생전 처음 타보는 국제선에서 난 처음부터 얼떨떨한 실수를 연발한다. 온몸으로 가볍게 가볍게 저항한다.
어제부터 따끔거리는 오른쪽 눈, 오늘 탑승 수속을 마친 직후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출구는 없었다. 온갖 면세점 사이로 약국은 보이지 않았고, 난 당황했다.
잠시 후 남편의 안내로, 출국장을 되짚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어쩌구 어쩌구 라저'하는 무전기 소리, 안내원을 따라 수없는 통관 공무원 틈을 비집고 다니며, '이 분은 몹시 건강이 나빠서, 급히 약국에 가야 합니다.'라는 친절한 말씀을 10번 넘게 하는 꼴을 보고서야 약국에 갈 수 있었다.
피곤하면 낫지 않는다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려받은 항생제 여섯 알, 이 알약들이 날 구할 수 있을까. 나의 어설픈 건망증과 촌스러운, 그야말로 어벙벙한 걸음걸이들을.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귀하고 귀한 네버스탑 물병을 잃어버렸다. 어떤 XY 횡재했겠다.
토하고 눈다래끼에 시달리고, 시작이 심상치 않으니, 12시간의 비행기 여행이 지루하지 않다.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 앞으로 다시는 와인을 마시지 않으리라.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창밖을 보았다. 정말 눈부신 푸른 빛. 난 하늘에 싸여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유유히 펄쳐진 점점이 뽀얀 구름들. 지금 이르쿠츠크는 선명한 가을일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도 아름다우니. 저 아래로 낮게 드리운 구름들의 변화로운 발자국들과, 그 아래, 나와 구름 사이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가깝게 놓은 산, 강, 계곡, 그리고 작은 마을. 현재 구름은 정지해 땅에 발붙히고 사는 사람들과 훨씬 친하다, 그 위를 떠가는 나같은 떠돌이보다는. 그래서일까? 멀리서 보는 세상은 참 곱다.
앞줄에 꼬맹이가 자꾸 운다. 사오개월 남짓한 아가는 지금 런던행이 상당히 피로한 모양, 민이를 데려올까도 생각했던 시간이 조금은 철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 이쁜 꼬맹이를 한없이 보고싶다. 건강히 잘 있어라. 아가야.
외지에서 만난 최초의 한국인은 민박 알선업자였다. 공항에서 나오자 마자 민박 권하는 그 남자, 우리가 BA항공사 리컨펌 때문에 헤매는데, 그딴 건 전화로 하면 된다며 퉁퉁댄다. 후후, 우리가 전화할 수 있으면 뭐하러 헤맸겠노. 언어가 안되는데, 직접 얼굴보고 부딪히는 게 상책이라 그랬지.
제 1청사에 있는 BA를 찾아 온갖 통로 다 해맸다. 안되는 영어, 특히 B와 V사이, G와 Z사이에서 정신 못차리고 벽에 꽈당부딪히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목표는 달성했다. 빈으로 가는 길은 한결 수월하겠다.
언더그라운드를 이용, 특이했다.
지하철은 양쪽 두 줄로 안게 되어있는데, 그 사이로 겨우 한사람 어렵게 통과할 것만큼 비좁아서 통행자는 쏘리를 연발해야만 한다.
작고 아담한 경지하철, 그 밖으로 보이는 비슷비슷하게 늙어가는 지붕들, 그래도 빨갛고 예쁜 빛, 사이사이 꿈처럼 푸른 나무의 도열.
무릎을 맞댄 여행객이 한국인이어서 지루하지 않게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30에 해외여행을 떠나와 40까지는 그러그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그 이후에 장신 대학원에 가겠다는 남자 그리고 학원강사하다 쉬고 따라나왔다는 여자. 그 부부의 자유는 어디서 온 것일까. 돈이 많아서? 타고난 심리적 여유? 숙소 하나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도는 그들의 당당함이 버겁도록 부럽다.
지하철 환승에 자신이 없어서 하이트 파크 코너에서 내렸다. 하이드 파크 공원을 가로질러 숙소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축적이 없는 지도만 탓할 뿐. 30분 이상을 걷고 또다시 30분 이상을 헤매다가 우리의 숙소를 찾았다. 중세 건물같이 생긴 낡은 집. 안내인은 줄곧 불어만 말해서 아무 것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들이닥치는 손님들도 온통 불어 연발, 세상에 영어도 안되는데 불어라니.
짐을 풀고 밖에 나가서 여관 주위 상점들을 돌아보았다. 맥도날드나 피자헛의 위력, 그리고 막강한 재패니즈를 실감하며 들어선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이태리어에 흠씬 젖어든다. 활기한 직원들의 몸놀림, 흥겨운 노래들, 벽을 가득 메운 옛날 영화 포스터들이 적당히 어우러져 멋진 공간이 연출되었다. 언어가 되기만 하면 훨씬 흥겨울텐데. 그들끼리의 흥성스러움만 보아도 그저 신났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남편은 굿나잇- 하더니 잠들어버렸다. 고단함이 오늘 밤을 지내고 어느 정도는 해소되리라.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처럼 떠도는 것,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단 지긋지긋해하던 일상에서의 탈출은 내가 두고 떠나온 공간을 객관화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다. 하이드 파크의 넉넉함, 그 속에서 푸욱 쉬고 있던 사람들의 조용하고 때로 경쾌한 시간들, 조금씩 나도 맑아질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리고, 꿈꾸는 소리...
하나,
모르는 게 많으니 물을 것도 많다. 길을 물으면 지나가는 청소부 아저씨도, 정말 성실하게 대답한다. 끝까지, 알겠다고 할 때까지. 그러나 그들의 방법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돌고 어떤 간판을 보고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그렇게 설명을 해도 우리가 절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가까운 information center 나 쉽게 알 수 있는 버스 노선을 자상하게 안내한다. 합리적이다. 그들의 합리성은 곳곳에서 넘쳐난다.
언제나 그들은 오른쪽에 선다.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늘 줄을 선다. 절대 왼쪽을 메우지 않는다. 얼떨결에 왼쪽에 서면 확실히 문제가 된다. 급히 가야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습관처럼 무신경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아무리 밀려도 오른쪽, 오른 쪽. 왼쪽은 금물이다. 물론 바쁠 땐 제외.
횡단보도도 합리적이다. 가운데 가로줄을 굵게 치느라 노력하는 한국 대신, 그들은 횡단보도에 네모난 점만 찍어 놓고 만다. 그렇게 굵은 줄은 필요없다. 왜냐면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차에 우선한다는 생각, 하지만 사람이 기계보다 먼저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한다는 관점은 모든 길 바닥에 look right, look left를 써 놓는 조심성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신호등보다는 길 바닥을 보며, 길 바닥이 요구하는 방향을 보며, 그 후에야 비로소 걷는다. 신호등은 외려 무시된다.
또한가지, 이상한 점? 이들은 더치페이 하지 않는다. 서양인은 철저하게 더치페이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한번도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관광지이고 다들 일행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한번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은 이상하다.
두울,
이 사람들의 안전의식에 대한 생각! 한 층에 몇 개씩의 소방문, 상점이든 여관이든 또는 박물관이든 모든 공간에는 소방문이 있다. 그것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길거리 공사판은 반드시 아주 튼튼한 안전망들이 콘테이너 박스처럼 채워져있어 관광객과 철저하게 분리된다. 안전 또 안전.
소방문이 특히나 많은 것은 그들의 역사, 과거를 보존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현재 그들을 먹여 살리는 조상들의 흔적은 절대로 한번에 몽땅 날아가지 않을 테니. 우리도 그들 같았으면, 씨랜드 참사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미스테리였을 것이다.(그들에게 씨랜드는 아마 X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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